[스크랩]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은1944년 4월 17일부터 12월 10일에 걸쳐 중국 대륙에서 행해진 일본의 마지막 대규모 공격 작전이다. 일본측의 정식 명칭은 이치고 작전(一号作戦)이며 중국에서는 예상계회전(豫湘桂会戦)이라고 부른다.
이 작전은 크게 전반의 경한작전(京漢作戦)과 후반의 상계작전(湘桂作戦)으로 나뉜다.
이미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던 대일본제국이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여 실시한 이 공세는 대륙 남북의 철도를 연결하여 남방의 자원 지대와 일본 본토간의 육상 교통로를 확보하며, 미국의 장거리 폭격기 B-29의 기지로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 각종 항공 기지를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군을 철저 격파하여 항전 의지를 분쇄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내걸고 있었다.
동원된 병력은 대략 40만명이며 작전 거리는 2,400km에 이르렀다. 비슷한 시기 버마에서는 무다구치가 우호작전(ウ号作戦)을 발동하여 임펄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고 있었다.
현지 보급(약탈)에 주로 의존하는 일본군의 특징으로 볼때 이 작전안 자체가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은 불과 8개월만에 광활한 중국 대륙의 남북을 연결하는 대륙타통 작전의 기계적인 목표를 100% 이상 달성했다. 그리나 1호 작전의 근본적인 목적은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제공권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광대한 대륙을 점과 선으로 연결하여 남방과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유지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었다. 또한 필리핀해 해전으로 연합함대가 참패하고 마리아나에 B-29의 기지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대륙의 미군 전략 항공 기지를 무력화킨다는 당초의 의도는 완전히 무색해지고 말았다.
1944년 3월의 중국 전선
- 경한작전(京漢作戦) -
1942년 일본군은 남방 전선의 순조로운 추이에 발맞추어 장개석 정부의 수도가 위치한 중경을 공략할 구상을 짜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소위 5호 작전으로 당초에는 그해 가을중으로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과달카날과 뉴기니 방면의 전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보류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방면의 전황이 더욱 악화된 1943년, 대본영에서는 중국 대륙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일본 본토로부터 남방 자원지대까지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를 확보한다는 작전안을 다시 발안하였다. 이 작전이 유력해지면서 태평양 방면의 절대 국방권 설정에 따른 중국에서의 5개 사단의 차출 계획이 취소되고, 오히려 만주의 관동군에서 더욱 많은 병력이 대륙으로 증원되었다.
1944년 1월 24일 대본영은 작전의 주요 목표를 '적 공군의 주요 기지를 격멸'로 명한 1호 작전의 실시를 정식으로 명령하였다.
작전의 목표를 가능한 좁힌 것은 도죠 히데키(東條) 수상겸 육군장관이었는데, 그는 남방과의 교통로 확보라는 목표가 비현실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畑俊六
반면 지나 파견군 사령관인 하타 슌(畑俊六) 원수는 1호 작전의 목표를 내부적으로 아래와 같이 상정하였다.
둘째, 적 공군 기지의 격멸
셋째, 중경 장개석 정권의 전쟁 기도 분쇄
대본영은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보안을 철저히 하도록 했지만, 장개석은 일본의 의도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의도만 알고 있을뿐 마땅히 대처할 수단이 없다는데 장개석의 고민이 있었다. 일본은 상대할 중국군의 규모가 탕은백(湯恩伯) 장군 휘하의 9 ~ 10개 군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1944년 4월 18일, 1호 작전은 우선 경한철도 타통작전(京漢作戦 打通作戦)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이 철도는 베이징(北京)과 한커우(漢口)를 잇는 1,220km의 길이로 하북(河北),하남(河南), 호북(湖北)성을 연결하는 중국 대륙의 심장선이었다. 지금까지 장강 유역에 포진한 중지군(中支軍)에 대한 보급은 수상 교통로를 주로 이용해 왔는데, 센놀트의 공격이 날이 갈수록 치열해져 보급로를 유지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경한철도가 개통되면 더이상 위험한 장강의 수상 교통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최단거리로 북지군(北支軍)과 중지군(中支軍)이 연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內山英太郞
이 작전의 최초 목표는 황하 남쪽 기슭에 위치한 정주(鄭州)의 공략이었다. 공격은 우찌야마 에이다로오(內山英太郞) 중장 휘하의 제 12군이 담당하였다. 4월 17일 황하를 건넌 12군은 불과 이틀만에 정주를 점령하였다. 한구의 제 11군도 전력의 일부를 빼돌려 신양(信陽) 방면으로 북상하기 시작하였다.
4월 29일, 제 37사단은 허창(許昌)의 공략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중국군 제 29사단이 수비하고 있었다. 5월 1일에 허창이 점령되었고 5월 9일에는 확산(確山)이 점령되어 남북의 일본군이 타통(打通)하는데 성공하였다.
5월 25일에는 고도 낙양(洛陽)이 점령되어 경한작전(京漢作戦)은 불과 37일만에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大陸打通作戦
- 상계작전(湘桂作戦) -
경한작전이 성공적으로 종료되자, 제 11군은 다음 작전을 위해 5월 하순까지 병력을 악주(岳州)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1. 제 1기 작전 - 형양(衡陽) 공략
2. 제 2기 작전 - 계림(桂林), 유주(柳州) 공략
3. 제 3기 작전 - 남부 오한(粤漢) 타통
4. 후단작전(後段作戦) - 남녕(南寧) 공략, 인도차이나(仏印) 타통
1944년 5월 27일, 일본 제 11군의 제 3, 제 13 사단이 좌익으로 그 외의 주력 부대는 28일부터 정면으로 공세를 시작하여 상계작전(湘桂作戦)이 시작되었다.
장개석의 중경 방송은 5월 31일, 일본의 작전 개시를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의도를 너무나 명확히 들여다보고 있다는데 놀랐다. 한편 1944년 6월 16일, 중국에서 발진한 B-29기가 최초로 일본 본토인 북 큐슈에 폭격을 가했다. 사태가 이지경이 되니 대본영이나 지나 방면군은 불난 호떡집처럼 난리법석을 떨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공격은 더욱 발악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薛岳
중국은 설악(薛岳) 장군 휘하의 제 10군이 장사(長沙)와 형양(衡陽)을 수비하고 있었다. 일본은 재빨리 장사를 빼앗고 형양을 공격할 작정이었다. 장사는 지금까지 일본군의 공격을 3차례에 걸친 공격을 막아냈던 요충지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설악은 이곳을 떠나 사령부를 후방의 형양으로 옮겼다.
사령관이 사라진 장사는 6월 18일에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6월 20일, 대본영은 사살 8,000 포로 획득 5,000이라는 전과를 발표하였다.
한편 후일 도쿄 전범 재판에서는 당시 벌어진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기소하였다.
일본군은 국제법을 위반하여 주민들을 몰살할 것을 명령하여 현재로서는 그 인원을 알 수 없는 무장을 해제당한 병사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더우기 여러 다른 도시와 같이 고의로 다수의 일반인을 살해하고 비인도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행하였다.
장사에서 일본군의 주력은 재편성에 들어갔고 4개 사단이 형양 공략에 동원되었다.
일본군의 선발대가 형양 외곽에 도착한 것은 장사를 점령한지 불과 닷새 후인 6월 23일이었으며, 26일에는 형양 비행장이 점령되었다. 그러나 형양의 중국군은 튼튼하게 토치카를 설치하고 완강한 저항을 거듭하여 일본군의 거듭된 공격을 버텨냈다.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이던 센놀트는 자신의 기지를 향한 일본군의 진격 속도에 경악하고 가능한 모든 항공 전력을 동원하여 이 공세를 막아내기로 결심한다.
7월로 접어들자 계림과 영릉에서 날아온 미군 비행기들이 형양 상공에서 일본군에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다. 형양으로 향하는 길의 다리들은 크기를 불문하고 모조리 폭격으로 부서졌다. 일본군 공병대가 망가진 다리를 며칠간의 중노동으로 복구해놓으면 즉시 미공군기들이 나타나서 다시 파괴하였다.
일본군 보병들은 미군기를 피하여 낮에는 나무 그늘에 숨고 밤에 행군하였다. 손쉬운 목표인 수송대의 트럭들은 가장 먼저 전멸당하여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일본군은 식량이 떨어져 아직 익지 않은 벌판의 벼이삭을 훑어내어 풋내 나는 밥을 지어 먹거나, 수류탄으로 물고기를 잡아 먹는 형편이었다. 징발부대가 편성되어 근처 마을에서 식량을 약탈해왔지만 그것도 곧 불가능해졌다.
중국군 3개 사단이 형양을 포위한 일본군을 역포위하여 배후가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휴식중인 중국군
한편 이시기 태평양의 필리핀해에서는 연합함대와 미해군간의 전투가 벌어져 연합함대의 항공 전력이 전멸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대본영은 1호 작전이 형양에서 정체되어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불같이 작전 수행을 독촉하였다.
마침내 제 11군 사령관 요코야마(橫山) 중장이 참모들을 동반하고 장사에서 형양 비행장으로 날아왔다. 전투사령부는 형양 북쪽의 작은 마을에 설치되었다.
폭탄을 등에 업고 수류탄을 가진 결사대가 몇번이고 줄지어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한줄로 늘어서 마지막 잔을 나누어 마신 병사들은 "죽을 때는 토치카의 총안구에 머리를 쑤셔 넣어라! 몸으로 총알을 못쓰게 만드는거다."라는 격려(?)를 들었다.
산포의 지원 아래 일본군은 개미처럼 함성을 지르며 중국군 진지에 돌격해갔지만 이내 조용해지곤 했다.
이렇게 완강하게 저항하는 중국군을 일찌기 보지 못했던 일본군들은 형양에 미군 지상부대가 있다고 수근대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1944년 8월 4일, 장사에 주둔해 있던 제 58사단이 형양으로 이동해왔고 다시 한번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일본군의 99식 폭격기 편대도 동원되어 중국군 진지에 폭격을 가했다. 밤에는 야습이 거듭되었다. 이 처절한 전투가 사흘간 격렬하게 지속된 끝에 드디어 일본군의 일부 병력이 형양 시내에 돌입하는데 성공하였다.
8월 8일 오전 7시, 드디어 중국의 방선각(方先覺) 사령관 이하 4명의 사단장과 참모들이 일본군에 항복하여 격렬했던 형양 전투는 종료되었다.
- 후단작전(後段作戦) -
형양이 함락되자 중국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이후 일본군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岡村寧次
8월 하순에는 후단작전(後段作戦)의 실시를 위하여 새롭게 제 6 방면군(第6方面軍)이 설치되어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대장이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방면군은 형양에 주둔한 제 11군(6개 사단), 광동의 제 23군(8개 사단)과 사노 중장의 제 34군(1개 사단) 외에 직할 사단 3개.. 총 12개 사단을 지휘하였다.
후단작전(後段作戦)은 먼저 계림(桂林)과 유주(柳州)를 공격하고, 일부 병력으로 멀리 귀주를 공략하여 중경을 위협하며, 주공격 부대인 제 11군에 호응하여 광동의 제 23군도 유주로 북상하고 그 일부는 남녕에 진출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와 연결을 도모한다는 방대한 내용이었다.
9월 7일, 제 11군은 영릉(零陵)을 점령하였다. 다음날인 9월 8일에는 다시 한번 B-29기의 편대가 큐슈를 폭격하여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일본군의 다음 목표는 최대 규모의 미공군 기지가 위치한 계림(桂林)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보급로가 길어짐에 따라 미군의 공습은 더욱 격렬해졌다. 요코야마(橫山) 사령관은 장교들을 집결시키고 다음과 같은 훈시를 늘어놓았다.
계림성 위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은 우리 11군이 아니라, 우리의 시체를 넘고 진군하는 후속부대인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신 무장을 다진 부대라 하더라도 먹지 않고는 싸울 수 없다. 일본군의 행군로에는 영양실조로 쓰러져 한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일본군 병사들이 흙빛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 앉아 있었다. 오랜 행군으로 구두가 닳아빠진 병사들은 이들의 구두를 벗겨 신었다. 같은 시기 버마의 임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1월 10일, 11군은 계림(桂林)에 제 23군은 유주(柳州)로 동시 공격에 들어갔다. 그동안 중국군 내부에서는 그동안 큰 변화가 있었다.
중국군의 참모장이자 동남아 방면 연합군 부사령관이던 조셉 스틸웰(Joseph Stilwell)이 장개석과의 갈등으로 물러나고 후임으로 웨더마이어(Albert Wedemeyer) 중장이 임명된 것이다. 웨더마이어는 일본군이 센놀트의 기지가 위치한 계림에 육박하는 현재의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었으나, 장개석은 수비대가 최소한 2개월은 버텨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은 일본군의 그림자가 보이자마자 별다른 저항도 없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후 일본군 제 23군은 남녕(南寧)을 공략하여 북상해온 부대와 연결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와의 길을 타통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 제 3기 작전(第3期 作戦) -
11월 중순, 호남과 광동을 연결하는 오한선(粤漢線)을 타통하기 위한 제 3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 공세에는 제 6 방면군의 제 20군과 제 23군이 동원되었으며, 남부오한(南部粤漢)철도를 기습 점령하고 수천(遂川)과 남웅(南雄)에 위치한 미공군기지를 파괴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1월 26일까지 목표했던 철도 노선이 모두 확보되었고, 2월 7일까지 미공군 비행장이 점령되어 작전은 완료되었다.
휴식중인 일본군
- 작전 종결 -
이로써 41만명의 병력과 자동차 12,000량, 67,000마리의 군마를 동원한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의 목적은 모두 달성되었다.
그러나 남방의 항공 기지를 상실한 미공군은 성도(成都)와 노하구(老河口)에 새로운 비행장을 건설하였으며, 일본군의 보급로에 대한 폭격은 더욱 격렬해졌다.
일본군은 다시 한번 노하구-예강(老河口-蕋江)작전을 실시하여 미군의 항공 기지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이 작전은 대륙의 과달카날로 불릴만큼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