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이 참가한 첫 전투는 1943년 9월 이탈리아 나폴리 남쪽의 작은 해안도시 살레르노에 상륙한 연합군이 로마를 향해 진격하는 과정에서였다. 그의 나이 24살. 그가 속한 100대대는 뉴욕을 출발해 2주일간의 항해 끝에 북아프리카 오란에 도착해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이 이끄는 미5군 6군단 산하 34사단 133연대에 배치됐다. 아프리카로 건너오는 배 안에서 심한 배멀미를 앓으면서 ‘첫 전투가 벌어질 때 나는 과연 어떨까? 나중에 평생을 두고 수치스럽게 생각할, 비겁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라고 끊임없이 반문했다.
그는 “60여년 전 이탈리아 시골에서의 첫 전투가 신비스런 경험이었다”고 회상한다. “탱크 포탄이 터지고 포성이 들려오는 방향에서 독일군 탱크를 보는 그 혼돈의 순간에 모든 주변 상황이 한눈에 들어와 차분히 정리됐다. 이와 함께 마치 전생에서 지금과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고 해법도 알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인지 최소한의 공포도 없었고 극도로 냉철해졌다.”
전장 한복판에서 드러난 그의 이런 면모는 키 173㎝의 평범한 체구의 동양인이 이후 숱한 전투에서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주는 바탕이 됐다.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그는 철모 대신 털모자를 쓰는 게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당시 미군 규정상 전장에서 철모를 벗어서는 안됐지만(위반시 1회 약 50달러 벌금), “철모가 번거롭다”며 털모자를 쓰고 빗발치는 총탄 사이를 누비는 그에게는 예외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는 생각으로 참호도 파지 않고 맨땅에서 자는 기벽(奇癖)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미 장교후보생 교육을 받을 때부터 탁월한 독도법(讀圖法)과 방향감각 능력을 보였다. 그는 “지도를 보면 머릿속에 실제 지형이 그대로 그려졌고, 처음 가는 곳이라도 일단 지도를 본 후에는 상상한 그대로 실제 지형이 펼쳐졌다”고 말했다. ‘커널 김’의 신화는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쌓이기 시작했다
1943년 9월 로마의 외항(外港)인 안지오 상륙작전에 성공한 연합군은 북쪽에서 보강 병력이 대거 내려와 안지오를 포위한 독일군과 장기 대치상태에 빠졌다. 로마 해방을 목전에 둔 연합군으로서는 독일군이 북이탈리아에서 불러들인 정예 탱크사단을 어디에 배치해두고 있느냐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연합군의 주공(主攻) 루트를 독일군이 정확히 예측하고 탱크사단을 매복시켰다면 만사는 물거품이 될 상황이었다.
이듬해 5월이 되자 클라크 사령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을 의식해 적정(敵情) 파악을 다그쳤다. 김영옥 중위가 속한 34사단도 안지오 전투에 합류, ‘독일군 포로를 생포해 적정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당시 100대대 정보참모를 맡고있던 그는 대대장 싱글스 중령에게 포로생포 작전을 자원했다. 수색대조차 수차례 포로생포에 실패했던 터라 “미친 소리”라는 말을 들었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는 적의 허를 찌르고자 했다. 극소수 인원으로 밤에 적진으로 침투해 적당한 장소에 매복해 있다가 낮에 움직인다면 승산은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계획은 ‘승인 불가’라는 딱지가 붙어 34사단 본부, 6군단 본부를 거쳐 5군 사령부까지 올라갔고 군사령부는 “자살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결행하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고 회신했다.
김영옥이 전투를 치른 프랑스 동북부 비퐁텐 마을의 성당. 성당 입구 동판에 '100대대 영웅 중 한 명인 김영옥 대위가 성당 오른쪽에서 부상당해 포로가 됐다가 치엔(chinen·당시 의무병)씨와 함께 탈출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는 작전지역 일대 항공 입체사진 수백장을 놓고 지형을 머릿속에 담기 시작했다. 적진에 침투하려면 아군의 참호, 철조망, 지뢰밭을 통과한 다음 그 반대 순서로 적군 지뢰밭, 철조망, 참호를 통과해야 했다. 5월 16일 일본계 아카호시 일병과 단둘이서 밤 10시30분 적진으로 침투했다. 악명 높은 독일군 지뢰밭을 40분에 걸쳐 포복으로 통과한 뒤 철조망을 뚫고 들어가 도랑에서 동이 틀 때까지 기다렸다. 뜬눈으로 밤을 샌 아군이나 적군이 모두 잠든 시간, 경계가 풀린 독일군 보초들의 시선을 피해 그는 개인참호에서 잠을 자던 2명의 독일군에게 다가가 입에다 총구를 쑤셔박았다. 그리고는 총으로 위협하며 4인 종대 포복으로 온 길을 되짚어 아군 진지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 광경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연합군 수뇌부는 마치 영화장면과 같은 포로 생포 소식에 광분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직접 전화를 걸어 “특별무공훈장을 수여하겠다”고 했다. 클라크 사령관은 훈장 수여식 때 부관의 계급장을 떼 그에게 즉석에서 대위 계급장을 달아줬다. 그의 포로생포 작전은 UPI 종군기자를 통해 세계로 타전됐다. 연합군은 그가 잡아온 포로로부터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5월 23일 ‘버펄로 작전’이라는 총공격을 개시했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개시되기 이틀 전인 6월 4일 로마에 입성했다
■■‘사무라이 김’의 전투
미국 본토에서 훈련을 할 때 한국계라는 이유로 일본계 사병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던 김영옥 소위가 실제 전투에서 부대원의 신뢰를 얻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레르노에 상륙해 치른 첫 전투에서부터 B중대 2소대장이었던 그는 중대장과 맞섰다. 그는 중대장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계곡을 가로질러 독일군의 기관총 진지를 공격했고, 중대장과는 다른 전진 루트를 고집했다. 지형지세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상관으로부터는 미움을 살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투결과는 그의 판단대로였고, 그는 부하들로부터 신뢰를 쌓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 ▲ 1944년 이탈리아에서 5군을 대표해 미국 전쟁성 부장관의 사열을 받고 있는 100대대 의장대.
왼쪽이 의장대장을 맡은 김영옥대위이고, 그 뒤에 클라크 사령관이 있다.
상륙 2개월여인 1943년 11월 산타마리아 올리베토에 있는 600고지 전투를 치른 뒤 부하들은 그를 ‘사무라이 김’이라고 부르며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2개 분대를 이끌고 기관총 진지 수개를 수류탄 공격으로 박살내고 독일군을 포로로 잡는 등 괄목할 전과를 올렸다. 허벅지에 총탄이 박히는 첫 부상을 입고 첫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것도 이 전투에서였다.
그가 대대 정보참모로 발령받은 1944년 1월 무렵 100대대는 첫 동계전투인 몬테 카지노 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입었다. 2주일 반 만에 잔여병력의 90%를 잃을 정도였다. 특히 몇 차례 전투에서 그의 목숨을 구해줬던 다케바 부소대장 등 많은 전우들이 옆에서 죽어갔다. 이 전투 이후 ‘영(Young)과 함께 있으면 죽음도 피해간다’는 믿음이 부대원 사이에 퍼져나갔지만 그는 거꾸로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전우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만일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다면 남은 평생을 내가 속한 사회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드는 일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불사조 같던 그도 1944년 10월 프랑스 동북부 산악지대 비퐁텐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
당시 100대대는 인근 브뤼에르 해방전투에서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으나 사단장의 무모한 전진 명령에 내몰리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당했고, 그는 적의 기관총탄 3발을 맞았다. 그는 들것에 실려 퇴각하다 적의 포위망에 갇혀 포로로 잡힐 뻔했다. 하지만 다른 전우들과 달리 항복을 거부하고 필사적으로 기어서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상처 부위가 썩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심장을 향해 몸이 식어들어오는 생사의 고비를 살겠다는 의지로 넘긴 끝에 페니실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1944년 6월 치러진 벨베데레 전투부터 작전장교의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미 보병대대는 2개 중대를 병렬로 포진시켜 공격하고 나머지 1개 중대는 예비중대로 뒤를 받치는 게 관례지만, 그는 지형에 맞지 않는 이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3개 중대를 동시에 작전에 투입했다. 이후 치른 사세타 전투에서도 그는 교과서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대대 공격에 군단과 군사령부의 포병 지원을 요청하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치밀한 작전과 강력한 화력 지원을 앞세운 공격은 이후 그의 장기가 됐다.
▲ 1944년 이탈리아 바다(Vada)로 진군 중인 100대대.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정보참모 김영옥 대위.
‘가짜 도강 작전’으로 피사 무혈입성 ■■피사 해방전쟁
피사 해방전도 김영옥의 작전 능력이 돋보인 전투였다. 로마를 함락하고 북상하던 연합군이 피사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 반도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을 건너야 했다. 대대 작전참모로 도강(渡江)작전을 짜는 데 골몰하던 그는 ‘가짜 도강’을 핵심으로 한 허허실실(虛虛實實) 작전을 짰다. 인류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피사에 대한 직접 공격 없이 강을 건너자는 게 핵심이었고, 로마 해방 후 독일군의 야포 수와 폭격 강도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꿰뚫은 작전이었다. 작전의 요지는 디데이(D-day) 나흘 전 가짜 도강작전을 한 번 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가짜 작전을 한 번 더 한 뒤 바로 다음 날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진짜 작전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작전은 그의 예상대로 맞아떨어졌다. 탱크 30대를 동원한 1차 가짜 도강작전에 독일군은 엄청난 포격을 가했다. 이틀 후 2차 작전이 실시되자 독일군의 포격 강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9월 1일 막상 진짜 작전이 실시됐을 때 독일군은 이번에도 가짜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포탄이 바닥났는지 단 한 발의 포격이나 총격도 가해오지 않았다. 부대는 도강작전이 시작된 지 불과 30분 만에 선두가 이미 아르노강을 건너고 있었다. 미군의 도강을 막지못한 독일군은 피사를 버리고 철수했고 연합군은 텅빈 피사에 아무 저항 없이 입성할 수 있었다.
▲ 한국전쟁 전황도. 김영옥이 1대대 지휘를 맡은 5월 23일, 5월 31일, 6월 15일의 전선이 보인다. 김영옥은 1대대 지휘를 맡아 북쪽으로 60km를 치고 올라가며 유엔군 9군단의 최선봉(노란색 부분)이 됐다.
◆ 한국전쟁 ◆
제대후 한국전 소식에 다시 사선으로
1945년 4월 그가 휴가차 LA로 돌아왔을 때 LA타임스는 그와 어머니가 만나는 사진과 함께 ‘전쟁영웅의 귀환’이라는 큼지막한 기사를 실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가다가 독일군의 항복(5월 8일)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정보장교로 남아달라는 펜타곤의 요청을 뿌리치고 1946년 명예 제대를 했다. 그는 군대에서 모은 3000달러로 당시로서는 생소한 ‘코인 론드리’(빨래방) 사업을 시작했고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하지만 사업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부모의 나라’를 돕기 위해 다시 사선(死線)으로 향했다. 그가 한국에 도착한 1951년 3월은 1·4 후퇴 직후였다. 그가 배치된 유엔군 9군단 산하 미 육군 7사단은 흥남철수로 사지(死地)에서 빠져나와 다시 북진을 준비 중이었다. 1952년 9월 한국을 떠날 때까지 1년6개월간 전투에 참가했지만 유럽 전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빡빡한 전투를 치렀다. 또 가장 큰 부상을 입은 것도 한국에서였다.
적진 앞에서 도망치는 국군 돌려세워
■■소양강 전투
김영옥 대위는 7사단에 부임하자마자 ‘베니대 그룹’(흥남철수 때 7사단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민간인들로 구성된 유격대)을 이끌고 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곧 31연대 정보참모로 발령이 났다. 2차대전에서 발휘했던 그의 대담함이 요구되는 상황은 우연히 찾아왔다. 1951년 4월, 31연대는 소양강을 건너 중공군과 장기 대치하던 17연대와 교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자마자 공산군의 제1차 춘계 공세가 시작됐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소양강을 건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방의 한국군이 무질서하게 후퇴하자 그는 맥카프리 연대장으로부터 인제군 개운동 계곡에 있는 다리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다. 일제 때 세워진 이 자그마한 다리는 유엔군과 한국군의 철수를 보장할 전략 요충지였다. 이 다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소양강을 건너야 하는 모든 부대가 엄청난 희생을 낼 상황이었다. 홀로 남은 그에게는 탱크 1개 소대(5대)가 보내졌다. ‘최소한 몇 시간은 적을 지연시켜야 아군이 소양강 남쪽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다’는 지시였지만 이미 전방의 한국군 3사단과 5사단이 중공군의 공세에 무너져 마구 후퇴하고 있는 긴급 상황이었다.
황당한 명령이었지만 그는 탱크 다섯 대를 다리 남쪽 공터에 일렬로 배치한 뒤 다리 앞에 버티고 섰다. 포성과 함께 적이 코앞에 다가오는 상황에서 탱크 5대 앞에 혼자 버티고 선 한국계 미군 장교의 모습은 기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침착하고 당돌한 행동은 허겁지겁 후퇴하던 한국군을 되돌려세우는 효과를 발휘했다. 150명 정도의 한국군이 후퇴를 멈추고 탱크 뒤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결국 적은 합동 방어진지가 효과적으로 구축된 것으로 판단했는지 다리 쪽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별다른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
유엔군 최선봉, 연전연승 ‘무적의 부대’ ■■역사상 첫 유색인 대대장
그는 한국에 부임한 지 7개월 만인 1951년 10월 31연대 1대대장으로 부임했다. 소령진급은 9월에 있었다. 그의 대대장 부임은 미군 역사상 ‘큰 사건’이었다. 2차대전 때까지만 해도 ‘백인만이 실전에서 중대급 이상을 지휘할 수 있다’는 뿌리깊은 인종편견이 있던 미군의 전통 아래 아시아계가 전쟁 한가운데서 전투부대 대대장이 됐기 때문이었다. 실제 김영옥은 미군 역사상 첫 소수인종 출신 전투부대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인 대대장 역할을 한 것은 훨씬 전부터였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보던 맥카프리 연대장은 연대 정보참모인 그에게 곧 작전참모 역할까지 맡겼고, 5월 23일부터는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교체하고 그에게 대대지휘까지 맡겼다. ‘대위 계급으로는 대대장을 맡을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지만 명목상의 대대장을 두고 실질적인 지휘는 그가 맡는 편법까지 동원됐다. 그가 1대대를 맡았을 때 병사들 사이에는 패배감이 만연해 있었다. 북진하다 함경도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맞아 연대장까지 잃으며 궤멸되다시피 했던 31연대에는 ‘장진호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중공군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태를 그대로 놓아둘 사람이 아니었다.
그해 5월 자신의 지휘 아래 구만산·탑골 전투를 치르면서 부대원에게 승리를 맛보게 했다. 포격으로 공격대형이 무너지곤 했지만 그는 병사들이 후퇴하면 반사적으로 몸을 튕겨 포탄이 작렬하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곤 권총을 빼들고 “후퇴하는 자는 즉결처분하겠다”며 전투를 독려했다. 부대의 사기를 다시 높인 이 두 전투로 그는 이탈리아 전투에 이어 두 번째 은성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에도 그는 부대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무모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 능선을 팔짱을 낀 채 왔다갔다 했다. 산봉우리에서 중공군이 쏘아대는 총탄에 겁먹은 병사들이 머리를 처박고 적군을 보지도 않은 채 총을 쏘는 것을 교정해주기 위해서였다. 병사들 사이에서 “너무 위험하다”는 아우성이 터져나왔지만 그는 “나를 보라. 괜찮지 않으냐”고 했다. 결국 머리를 내밀고 총을 쏜 미군에게 중공군은 쫓겨갔다. 이 전투에서 그의 군복에 난 총탄 구멍만 세 개였다.
현재의 남이섬 인근에서 벌어진 금대리 전투 때는 적진 30㎞를 4시간만에 관통하는 야간행군을 시도해 승리를 낚았다. 중공군은 적군의 대대병력이 사전포격도 없이 자신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다 밤을 새워 달려온 그의 부대에 일격을 당하고 패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면모를 일신한 1대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하면서 ‘무적의 부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대대를 앞세운 31연대는 중공군의 마지막 총공세를 저지한 유엔군의 재반격을 인도하는 견인차가 됐는데, 5월 27일 유엔군이 전 전선에서 일제히 38선을 다시 넘었을 때 선두로 돌파한 보병부대가 1대대였다.
그의 탁월한 전투 지휘능력은 전황도로도 증명된다. 그가 1대대 지휘를 맡은 5월 23일 작전 전황도에는 1대대가 다른 부대와 같은 선상에 있지만 1주일 후인 5월 31일 전황도에는 1대대가 혼자서 삐죽이 화천 이북까지 진격해 유엔군 9군단의 최선봉이 됐다. 이후 6월의 전황도에도 중부전선의 가장 선두에 그의 부대가 있었다. 중부전선이 북으로 치솟아 지금의 휴전선 모양이 만들어진 데는 그의 역할이 컸던 셈이다. 그가 평강-철원-금화로 연결되는 철의 삼각지대에 들어가 오인포격을 당한 것도 빠른 진격속도 때문이었다. 그의 부대는 화천 인근 541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휴식을 취하다가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대대본부가 쑥대밭이 되는 참사를 겪었다. 이 사고로 그는 오른쪽 무릎을 파편이 관통하고, 왼쪽 다리 발목이 파편에 맞는 중상을 입었다.
일본 오사카로 후송돼 다리 절단의 위기를 넘긴 그는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되자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8월 27일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리곤 그 해 10월 정식으로 1대대장에 부임했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국 전선을 지키던 그는 신임 연대장 모세스 대령이 병사들의 목숨을 담보로 의미없는 전투를 계속하자 1952년 9월 한국을 떠났다.
하와이 출신 일본계 별동부대… 유럽전선서 혁혁한 무공 올려
김영옥이 이끈 100대대(One Hundredth Battalion)는 하와이 주방위군이 모태였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년 12월) 이전에 하와이 주방위군을 징집했다가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로 항진해 오자 방위군 내 일본계 병사의 충성심을 의심해 이들만 따로 본토로 이동시켜 비밀리에 훈련을 시켰다. 1400여명의 하와이 출신 일본계들이 100대대의 주력이었다.
통상 1, 2, 3대대 하는 식으로 불리지 않고 100대대라는 이상한 부대명칭이 붙은 것답게 100대대는 당초 어떤 사단이나 연대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작전을 하도록 편제됐다. 1943년 9월 본토를 떠나 아프리카 전선에 올 때까지 미군 수뇌부는 이 소수인종 부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본래는 아프리카에서 수송 호위부대로 활용하려 했으나 부대원의 전투참여 의지가 강하자 뒤늦게 이탈리아 상륙부대인 34단에 배치했다.
하지만 100대대는 유럽전선에서 명성을 쌓아갔고, 나중에 상급 지휘관들은 서로 100대대를 달라고 요청했다. 100대대가 얼마나 전투에 내몰렸는지는 이탈리아 상륙 4개월 만에 병력의 60%를 잃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100대대는 이후 치러진 벨베데레, 사세타 전투 등에서도 혁혁한 무공을 올리며 단일 부대에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클라크 사령관은 100대대를 자랑스럽게 여겨 영국왕 조지 6세 등 연합국 VIP들이 이탈리아 전선을 시찰할 때면 100대대 장병을 뽑아 의장대로 내세우곤 했고, 김영옥 대위에게도 종종 의장대장 역할을 맡겼다.
일본군 무장해제 위해 한국 주둔… 수많은 전과 올리며 ‘아리랑 사단’ 별명
한국전쟁 때 김영옥이 속했던 미 7사단은 1차 세계대전 중 창설돼 독일과 프랑스 국경지대에 투입됐다. 2차대전 때는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종전을 맞았다.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에 남아 있는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남한에 주둔한 군대가 7사단이었다. 남한의 군정군으로 있던 7사단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일본 홋카이도로 이동해 있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전쟁 초기 7사단은 극동사령부 예비사단으로 남아 한국에 파견된 주일미군에 병력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10군단을 급조하면서 7사단을 포함시켰을 때는 병력이 정원의 50%에도 못미쳤다. 그러자 7사단은 ‘카투사’라는 이름의 한국 청년들로 병력을 채워 사실상 한·미 혼합부대가 됐다. 1951년 5월 김영옥이 속했던 31연대의 경우 4500명 가운데 미국인과 한국인의 비율이 대략 3 대 1 정도였다.
7사단은 한국전쟁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나중에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민요 아리랑을 단가로 선물받아 ‘아리랑 사단’이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이후 한국에 머물던 7사단은 1971년 3월 미국 정부의 주한미군 감축 방침에 따라 한국에서 철수했다.
정장열 주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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