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스크랩] [라바울 항공전]

남사장 2009. 1. 31. 12:55

태평양 전쟁중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은 남태평양 방면 일본해군 최대의 군사거점이었다.

뉴브리튼 - 솔로몬 방면에서 도시라고 부를만한 곳은 라바울이 유일했는데, 당시 인구가 대략 14,000명 가량이었다. 라바울은 원주민 언어로 붉은 숲이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1910년 독일이 남태평양의 식민지 개발을 위해 계획적으로 만든 거점이었으며, 1차대전 중인 1914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42년에는 다시 일본군이 뉴브리튼섬과 라바울을 빼앗아 남태평양 일대의 일본 점령지들을 관할하는 중심으로 삼았다. 

일본군의 유명한 항공대 기지가 있는 이곳을  연합군은 라바울 요새라고 불렸다. 라바울 항공전이란 바로 이 기지와 인접한 부겐빌 섬을 놓고 일본군 항공대와 연합군 항공대간에 치열하게 벌어진 공중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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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村均


라바울에는 일본 육군 제 8방면군 쓰요시 부대의 이마무라 히토시(今村均)대장 총지휘 아래, 가게사 모도아끼(影佐禎昭)중장의 방위사령부, 모모다께 하루요시(百武晴吉)중장의 제 17군, 아다찌 하다조오(安達 二十三)중장의 다케시 부대, 제 4항공군 예하의 스도오 에이노스께 중장과 이다바나 기이찌(板花義一)중장 지휘하의 2개 비행단이 주둔하여 많을때는 20만이 넘는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해군 전력은 남동방면 함대 구사카 마카시(草鹿任)중장의 제 11 항공함대, 그 휘하의 제 26항공전대에 소속된 582, 201, 204의 함폭, 함공, 전투기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말굽처럼 넓게 펼쳐진 항구에는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항시 몇십척씩 대기해 있었다.



- 도입 -

과달카날에서 벌어진 6개월간의 처절한 소모전을 견디다 못한 일본군은 미군 몰래 섬에서 철수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연합함대는 나머지 솔로몬 제도를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거듭했다. 솔로몬이 무너지면 뉴브리튼섬의 라바울이 위험해지고, 라바울이 떨어지면 태평양 방위의 마지노선인 연합 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트럭섬까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었다.

1943년 4월 7일부터 14일까지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친히 지휘하는 가운데 이호(い号) 작전이라 명명된 대규모 항공 공격이 이루어졌지만 별다른 소득없이 귀중한 항공전력만 손실하였다. 악화되는 전선을 추스르기 위해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방문하던 야마모토는 1943년 4월 18일 오전 9시 35분, 솔로몬 제도의 부겐빌(Bougainville)섬 근처에서 미군 P-38의 매복에 걸려 살해당했다.

야마모토가 사망한 후에도 솔로몬, 뉴기니 방면의 항공전은 계속되었다. 5월에 접어들어서는 러셀섬 부근에서 맹렬한 공중전이 벌어졌다.


격렬한 일본군의 반격에도 미국의 기세는 꺽일줄을 몰랐다.


"적 유력부대 북상중"

솔로몬 해역을 초계중이던 일본군 잠수함이 다급하게 뉴조지아섬의 일본군 기지로 무전을 날렸다. 6월 30일 오전 3시였다.

미군은 뉴조지아 바로앞에 위치한 렌도바섬에 상륙했다. 사흘간 거친 날씨가 계속되는 틈을 탄 기습이었다.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지 반년 가량이 지난후 미국은 새로운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고 있었다. 솔로몬 제도의 섬들은 좁은 해역에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에 모든 지역이 미국과 일본 기지항공대의 활동영역 안에 들어있었다. 따라서 공격이건 수비건 전투의 성패는 항공전의 결과에 달려있었다.

미군 상륙선단이 접근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항공대 사령부는 부겐빌섬의 부인 기지로부터 즉각 함폭과 함공들을 출격시켰다. 공격은 오전과 오후에 걸쳐 수차례 반복되었으나 미군은 이미 2개 사단을 섬에 상륙시킨 뒤였다. 렌도바는 열흘이 지난 7월 10일 완전히 미국의 손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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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通


7월 12일 밤, 순양함 신쓰우(神通) 이하 제2, 제3 수뢰전대가 증원부대를 싣고 코론반가라섬으로 향하던 도중 미국 함대와 조우하여 기함 신쓰우가 격침당했다.

7월 19일 밤에는 중순양함 구마노(熊野)가 구축함들을 이끌고 육군부대 800명을 코론반가라섬으로 운송하던중 다시 어뢰공격을 받아 두척의 구축함을 상실했다.

7월 22일에는 수상기 항공모함 닛싱(日進)이 부인기지를 향해 부겐빌섬 동쪽 해안을 항해중 20여기의 미군기의 습격으로 침몰되어버렸다.

소모전은 끝없이 계속되었고, 솔로몬 해역은 점차 일본 항공기와 함선들의 묘지로 변해갔다.


8월 15일, 미군은 후방의 일본군 기지를 내버려둔채 북쪽의 베라라베라섬에 상륙했다. 이 섬이 점령되자 솔로몬 제도 중부는 사실상 미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전선은 솔로몬 북부의 부겐빌로 옮겨졌다. 따라서 남태평양의 일본군 최대 거점이라는 라바울도 드디어 최전선에 가까워지게 된다.


한편 이즈음 태평양의 하늘에는 가공할 신형전투기 F6F HellCat(일본군은 와일드캣이나 헬캣 모두를 구라망이라 불렀음.)이 나타났다. 헬캣은 F4F와일드캣을 개발한 그루만사가 새롭게 내놓은 전투기였다. 헬캣은 와일드캣보다 크고 견고한 기체 프레임에 강력한 Pratt & Whitney 2,000마력 피스톤 엔진을 장착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유리한 전황에 우수한 신형 전투기까지 가세한 미해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 절대국방권 -

1943년 가을에 이르러 일본군 수뇌부는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태평양의 넓은 전선을 더이상 커버할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선을 보다 현실적으로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었다.

가령 1943년 8월에는 육해군 통수부 연합으로 워게임을 실시한 결과 라바울은 포기하고 마리아나, 카롤린 제도와 서부 뉴기니를 잇는 선으로 후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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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국방권 - 푸른색 점선


이후 1943년 9월 30일에 열린 최고회의에서는 절대국방권의 구상에 관련된 전쟁 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 변경에 따라 새롭게 구축해야할 방어선의 준비가 매우 부실하다는 점이 문제였다. 군령부 작전 과장이던 야마모토 치카오(山本親雄)는 8월 말경, 현재 상태로서는 새로운 방어선에서 항공부대의 비행장도 충분히 준비할 수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절대국방권 설정에는 또다른 난점이 있었다.

첫째, 파푸아 뉴기니로부터 솔로몬 제도 북부까지 수십만에 이르는 육군과 항공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강력한 남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사령부와 대치하고 있었다. 만약 전선을 뒤로 후퇴할 경우 연합군의 공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둘째, 전선의 병력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이동시킬 수송 수단의 확보도 만만치 않았다. 부족한 수송선을 후방에서 끌어왔을 경우 일본 본토로 향하는 자원 수송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문제와 더불어 군령부와는 별개로 해군의 실전부대를 총괄하는 연합함대는 전수방어에 치중할 경우 결국 전쟁에서 패배할 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국방권이라는 튼튼한 방어선 확보보다는 일거에 태평양의 전세를 결정짓는 일대 결전 - Z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 로호작전(ろ号作戦) -

중부 솔로몬에서 일본군이 완전히 철수한 이후, 라바울에는 한때 맹렬했던 공습이 중단되어 고요한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3년 10월 12일 오전 8시 느닷없이 150여대의 미군 항공기가 저공으로 접근하여 라바울 기지에 대공습을 가했다. 2시간 후에는 폭격기 80대가 나타나 정박중이던 함대에 폭탄 세례를 퍼부었다. 라바울이 대낮에 공습을 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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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에 매달린채 라바울기지로 투하되는 미군 폭탄


이 공격은 연합군의 새로운 움직임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미군의 작전은 항상 대공습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라바울을 함락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뉴브리튼섬의 일본군은 요소요소에 수비대를 배치하고 인접한 섬 뉴아일랜드의 경계까지 대폭 강화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다음 공격 목표가 부겐빌섬인지 라바울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솔로몬 제도에서 양측의 대치는 꽉 맞물려 있었다. 일본은 차츰 열세에 몰리고 있었지만 기회를 잘 포착하여 일격을 가한다면 아직 작전의 주도권을 빼앗을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라바울은 대본영에 증원요청을 빗발치듯 계속하였다.

계속되는 증원 요청에 따라 대본영은 항공대를 라바울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라바울 기지항공대는 연일 소모를 거듭하고 있었다. 특히 기관총에 스치기만 해도 불타버린다고 해서 1식 라이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1식육공의 경우 총 50기중 가동되는 것은 20기 뿐이며 그중에서도 실질적으로 주간 뇌격을 감행할 수 있는 전력은 12기 뿐인 상태였다.

그러나 1943년 10월14일과 16일, 군령부는 미군 기동부대가 중부 태평양 혹은 일본 본토로 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경보를 울렸다. 이 정보는 미국의 통신 암호를 해독하여 얻어낸 것이 아니라, 통신량의 변화로 판단내린 짐작에 불과했다. 연합 함대 사령부는 군령부의 경보를 믿지 않았지만 트럭섬에 주둔중이던 함대 주력을 브라운 환초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 경보는 결국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연합함대는 불필요하게 기름만 소비한 후 9일 뒤에 트럭으로 돌아왔다. 이 출동으로 기지에 비축되어 있던 중유가 고갈되어 대본영에 보급을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이미 일본 본토에도 30만톤의 중유밖에 없었다.


군령부의 나카자와(中沢佑) 작전부장의 계산에 따르면, 중유 고갈로 활동을 멈춘 연합함대의 재출격이 가능한 시간표는 다음과 같았다.

제3 함대와 제 2 수뢰 전대는 10월말에 출동 가능
제3 함대와 제 2 함대는 11월 초에 출동 가능
제3 함대와 제 2 함대와 제 1 전대(야마토, 무사시)는 11월 10일에 출동 가능
트럭섬 주둔 전력 전체의 출격은 11월 중순에 가능

게다가 당시 태평양에서 활동중인 기동 부대는 제 1 항공 전대 뿐이고, 제 2 항공 전대는 싱가폴에서 재건중이었으며, 제 3 항공 전대는 핵심인 2척의 치토세(千歳)형 항공 모함 중 치요다(千代田)의 개장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다음해 2월 이후에나 투입이 가능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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福留繁


이런 상황에서 함대를 움직여 라바울을 구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토메 시게루(福留繁)는 그동안 아껴두었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의 제 3함대 함재기들을 일시적으로 라바울로 보내서 항공전에 가담시킨다는 이른바 로호작전(ろ号作戦)을 발안했다. 앞선 1943년 4월에도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제 3함대의 함재기를 라바울에 진출시켜 이호(い号)작전을 실행한 결과 별다른 성과없이 귀중한 항공기만 잃은바 있었다. 7개월이 지난후 연합함대는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려 하고 있었다.

1943년 10월 28일, 고가 미네이치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로호작전(ろ号作戦)을 발동하여 총 180기의 항공기를 라바울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 4개월 전에 라바울로 이동한 제 26 항공전대는 그동안의 소모전으로 전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다.


그러나 증원군이 도착하기 하루전에 미국이 선수를 쳐서 대병력을 북상시켰다. 이미 라바울은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에 삼켜지기 직전이었다. 10월 31일 이른 아침, 미 제 3 해병사단은 라바울의 코앞에 위치한 부겐빌(Bougainville)섬에 상륙하였다. 이때 일본군 사령부에는 미군이 쇼틀랜드섬에 상륙한다거나, 부카섬을 함포사격했다는 둥 제각각의 혼란스러운 정보가 접수되었다.

몇시간이 지나서야 대략의 정보가 접수되었다. 미군은 부겐빌 섬 서쪽 해안의 오거스타(Augusta)만의 북부에 주력을 상륙시켰으며, 일부는 다시 북쪽 10마일 지점에 상륙했다. 동원된 함선은 순양함 8척과 구축함 17척이며 상륙 병력은 대략 1만명이라는 것이었다. 적공격 개시의 보고에 따라 라바울 기지는 항공기의 폭음으로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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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울 - 솔로몬 일대 -> 클릭해서 자세히 보세요!


11월 2일 제 1 항공전대의 항공기들이 미군 상륙선단을 공격하기 위해 출격했다. 그러나 공격기들이 떠나자마자 미군 항공기들이 라바울을 습격해왔다. 상공에서 엄청난 난전이 일어났으며 미군 항공기 다수가 격추되었다.


11월 5일 아침에는 아타고를 비롯한 제 2함대 순양함 7척이 구축함들과 함께 라바울에 입항했다. 그러나 곧 미군 제 38 기동부대 함재기들이 라바울을 공습했다. 함대는 바다로 대피하였으나 대부분 손상을 입어 트럭섬으로 돌아갔다.

같은날 12시 25분, 라바울의 남쪽에서 미국함대를 발견한 일본은  15시 15분에 공격대를 발진하여 해가 진 40분후 야간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과는 항공모함 2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격침이었다. 이튿날 아침 라바울 기지는 환호로 뒤덮였다. 그러나 정찰기가 찍어오는 사진에 담긴 미국 해상 전력이 더욱 강화되어 있었다. 이날 일본 공격대는 해병대의 LST와 어뢰정 3척을 기동부대로 오인하여 공격했으며, 실제로 가라앉은 함정은 어뢰정 1척 뿐이었다.

11월 6일 오후 1시, 육군병력 1천명과 대포 2문, 속사포 1문, 식량 12일분을 실은 4척의 구축함이 어뢰정대의 호위하에 라바울을 출발하여 7일 0시 30분에 부겐빌의 미군 상륙지점 북쪽에 도착했다. 이때 달빛 아래에는 미군의 순양함과 구축함 수십척의 호위하에 대형 수송선 7척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지만 일본 함대지휘관은 25분만에 병력을 상륙시킨후 그대로 되돌아왔다. 


11월 8일은 맑게 개인 날이었다. 이날 부겐빌의 미군 수송선단을 향해 3차례에 걸쳐 대공습이 감행되었다.

97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1차 공격대를 이루어 수송선단을 공격하였다. 2차, 3차 공격대는 호위함대를 노렸다. 처음 기지에 들어온 전과는 따르면 수송선 2척과 구축함 3척이 격침되고, 순양함 2척 대파였다. 엄밀한 평가에 따라 이 전과는 전함 3척, 순양함 2척 격침. 전함 1척과 순양함, 구축함 3척을 대파. 기타 기타 순양함과 구축함 수송선 다수를 격침한 것으로 수정되었다.

대파된 전함은 격침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다. 1식 육공 6기는 나란히 있는 전함 3척을 동시에 격침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이 전함들은 영국의 KGV급이라고 보고되었다.

이튿날 아침 정찰기들이 전과 확인을 위해 미 함대를 확인해본 결과, 순양함과 구축함, 수송선은 꽤 많이 볼수 있었으나 전함은 찾지 못했으며 해안에는 중유가 흥건히 흐로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결국 미해군 전함 4척이 격침되어 대타격을 입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것은 이 전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될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일본 항공대가 제아무리 적선을 격침시키고 가라앉혀도 미군 함정들은 끝없이 계속 밀어닥치는 것이었다.  라바울 사령부의 참모들은 미국의 거대한 물자와 무한한 생산력 앞에는 제아무리 큰 전과도 따라갈 수 없다고 탄식을 늘어놓았다.


軍艦行進曲


어쨌든 부겐빌에서 거둔 연합함대의 대전과는 웅장한 군함행진곡을 배경으로 전국민에게 당당하게 발표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실제 이날 격파된 것은 미군 수송선 2척과 경순양함 버밍험 뿐이었다. 일본의 전과 집계는 완전히 엉터리였던 것이다.


대전과(?)와는 별개로 미군의 라바울 공습은 계속되었다. 공격은 하루에 3번 이상으로 정해져 있었다. 첫번째 공격은 해가 뜨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마지막 공습은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오전과 오후에는 B24 폭격기 편대가 고공에서 폭격을 반복하였다.

미군은 라바울에 투입할 수 있는 항공기 전력 600기를 항상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 3함대 사령관 할지는 상부에 항공전력 증원을 요청하였고, 항공모함 에섹스와 벙커힐, 인디펜던스를 보유한 제 50.3 기동부대가 파견되었다.

11월 11일에는 아침부터 큰 비가 내렸다. 그러나 날씨에 관계없이 제 3함대 함재기들은 라바울을 3시간에 걸쳐 공격했다. 공격이 끝나자마자 일본이 다시 역습을 감행했다. 일본 공격대는 11시 42분에 제 50.3 기동부대를 발견하여 공격을 시작했지만 전투기2기, 함폭 17기, 함상공격기 14대를 잃었다.

로호작전이 시작된 이래 가장 큰 손실이었다. 라바울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공격대는 항공모함 2척을 격파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 전과는 제로였다. 이날밤 다시 1식육공 11기, 함상 공격기 10대가 출격했지만 역시 아무런 전과도 거두지 못했다.



- 라바울 항공전의 종결 -

제 1 항공함대는 불과 11일만에 전투기의 1/3을 잃고 함폭, 함공기 상당수도 상실했다. 오랜기간 양성한 함재기 승무원도 절반 가량을 잃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전멸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연합함대 사령부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전과 보고를 종합하여 솔로몬 방면의 미군 기동부대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古賀峯一


결국 11월 12일, 고가 미네이치(古賀峯一)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로호작전의 중단을 명령했다. 오자와 지사부로의 제 3함대 사령부는로 11월 13일 아침에 라바울을 출발하여 트럭섬으로 돌아갔다. 항공기들 또한 다음날까지는 모두 트럭으로 귀환하였다.

당초 일본군은 로호작전이 대성공이라고 판단하였다. 물론 이것은 잘못된 전과의 누적에 의한 것이었다. 일본측이 실제 참담한 전과를 접한 것은 전쟁이 끝난 후 미군을 통해서였다.

작전을 중지한지 반달이 지나지 않은 11월 하순, 중부 태평양 방면으로 미군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호작전의 손실에서 회복되지 못한 기동부대는 투입이 불가능했으며, 수상함대도 중유 문제는 해소되었지만 다수의 선박이 수리를 요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출격이 불가능했다.

결국 연합함대 사령부가 벼르던 중부 태평양에서의 일대 결전 계획(Z작전)은 실행이 불가능해졌다.


한편 12월 15일, 미군은 뉴브리튼섬의 서부에 위치한 마아카스 반도로 상륙했다. 이것을 계기로 라바울 항공전은 다시 격화되었다. 그러나 다음해 2월 17일에 트럭섬이 미 기동부대의 공격에 의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20일에는 라바울 항공대가 트럭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로써 라바울 기지는 단 1대의 항공기도 없는 비행기지가 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저하게 고립되고 말았다.



- 라바울 항공전 이후 -

1943년 12월 17일부터 3개월간 라바울에는 미해군 제3함대 사령관 할지 중장과 미육군 남서 태평양 방면 사령관 맥아더의 협력하에 연일 공중 공격이 퍼부어졌다. 그러나 이미 이때부터 미군 내부에서도 태평양 방면의 작전에서 라바울을 점령이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1943년 11월경 부겐빌섬 상륙 직후의 일본 항공대 공격에 의한 위기 상황은 결국 별다른 피해없이 무사히 넘길수 있었다.그러나 이에 경각심을 느낀 할지는 1943년 12월 23일부터 26일까지 하와이에서 니미츠와 사전 협의후, 1944년 1월말까지 워싱턴에 머물며 미해군 작전부장 킹 제독에게 라바울 점령이 불필요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설명했다. 할지는 라바울의 주변 항로를 막을수 있는 그린 제도(Green islands)와 세인트 마티아스 제도(St. Matthias Group), 에미라우섬(Emirau island), 애드미럴티 제도(Admiralty islands)의 마누스섬(Manus island)을 점령하여 라바울을 포위하면 남태평양 방면에서 일본군의 작전은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피력했다.

1944년 1월말, 할지는 이 방침을 니미츠와 맥아더에게 설명하기 위해 다시 하와이의 진주만으로 향했다. 작전 회의에서는 결국 할지의 견해가 채택되어, 그린섬을 1944년 2월 19일까지 점령하고 마누스섬은 1944년 2월 29일부터 공략한다는 일정표가 짜여졌다. 맥아더는 카비엔을 1944년 4월 1일,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라바울을 우회한 이후 작전 전개는 일단 필리핀을 점령하고 그것을 기지로 하여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일본 본토를 차례로 공격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1944년 5월에 열린 샌프란시스코 작전 회의에서 킹제독이 필리핀 대신 대만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들고나왔다. 스프루언스는 중국 상하이 남쪽의 카미야마만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며, 그밖에도 여러가지 의견들이 제시되어 작전계획이 혼선을 빚게 되었다. 

어쨌든 미해군은 새롭게 건조된 항공모함들을 차례로 취역시켜 1943년 11월부터 1944년 7월까지는 스푸루언스 중장의 제 5 함대 사령부의 지휘하에 길버트, 마샬, 사이판을 공략하였으며, 이후 1944년 8월부터 1945년 1월까지는 할지 중장의 제 3 함대 사령부가 지휘권을 계승하여 레이테와 대만을 공략하여 일본제국의 숨통을 틀어막게 되었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대영제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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